# 북한산 3인방


오랜만에 혼자 북한산에 가봤다.

산에 가볼때가 됐는데라고 생각만 했고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다 단풍이 다지고 앙상한 나무만이 남아있는 북한산에 가게될까봐

이불 밖을 벗어나 북한산으로 향했다.



북한산을 올라가면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3명과 나란히 가게 되었다.

별 생각없이 올라가다 문득 저 3명에게 뒤쳐지기 싫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나아갔고

쉬고 싶었지만 꾹 참고 힘을 쥐어짜냈다.


열심히 올라가다가 도저히 남은 힘이 나오지 않길래

경쟁심을 잠시 내려놓고 중간에 결국 쉬었다.

근데!!!

그 3명도 같이 쉬는게 아닌가...

쉬는 장소도 아닌데..

그리고 힐끗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한번 해보자는 건가?ㅋㅋ

20대 중반을 대표해서 20대 초반과 등산 시합을 하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시 올라가자 그 3인방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연의 적막함 속에 불타오르는 무언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1차전 시작....

내가 앞장서 가고 있었다.

내 앞을 막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길이 아닌 곳으로 추월해가며 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나이차이로 내 발걸음은 무거워졌고

3인방의 숨소리가 내 바로 뒤까지 느껴졌다.

'안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내 안의 숨은 힘을 이끌어 내며 허벅지를 불태웠지만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서 잠자고 있었던 허벅지는 이미 기절한지 오래....

기절한 허벅지를 손으로 열심히 달래며 한걸음 한걸음 떼었지만

20대 초반의 건강한 허벅지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추월당했고 나의 패배로 끝났다.


패배의 설움을 달래며 물을 한 켭 들이키고 좀 쉬다가 올라가다보니

조금 위쪽에 그 3인방이 쉬고 있던게 아닌가?!

그래... 너희도 힘들었지? 나만 힘든게 아니었어...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모른채

힘들지 않은 척 ㅎㅎ

시크하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3인방을 지나갔다.



역시나!!!

그 3인방이 곧바로 뒤를 따라오는게 아닌가!!!


2차전 시작의 경종이 울리며

다시 산속은 소리없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앞장서가고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허벅지에게 물이라는 에너지 드링크를 부어넣어서 그런지

허벅지 상태는 좋았다.

1차전의 설욕을 앙갚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20대 초반과 중반은 내 생각보다 꽤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젠 영혼이 반쯤 떠난 허벅지를 되살리기 위해

앞에 사람 많아 빠르게 갈 수 없을 때

조금씩 쉬며 체력을 보충했고

최단거리 전략을 쓰면서

부족한 피지컬을 전략을 쓰며 보충하려고 했었다.


허벅지는 초죽음 상태가 되었고

종아리마저 조금씩 쥐가 올듯 말듯하는게 느껴졌다.


'하 이게 내 마지막이구나'

2차전도 결말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나는 KO패를 당했고 3인방의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1,2차전 모두 졌기에 깔끔하게 승부를 인정하고

느긋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산 시합에 신경쓰느라 몰랐지만

꽤 올라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며

폐쇄된 공간에서 눅눅한 공기로 오염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가을이라 그런지 백운대 정상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옆에는 낭떠러지라 다른 길로 추월할 수도 없었고

고생한 허벅지도 쉬는겸 쉬엄쉬엄 올라갔다.


오늘 날씨가 좋아 백운대 정상에서 한강에서 이어지는 바다까지 보였다.

그러나 너무 추웠다.

땀도 마르고 바람도 거세어 정상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소심하게 인증샷을 찍고 정상에서 내려갔다.

내려가다보니 올라오면서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바닥에 무수히 흩어진 낙엽들

나무를 감싸고 있는 이끼

나무 사이사이 존재감을 알리는 햇빛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까지

산이 내뿜고 있는 숨이 느껴졌다.


시간도 많이 남았고 해서

내려가다 풍경을 보며 가만히 멍도 때려보고

풍경사진도 여러각도로 찍어보며 천천히 내려왔다.


겨울이 벌써 찾아온 정상과 다르게 밑쪽은 아직 가을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빨갛게 익은 단풍나무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아직 겨울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어릴 적 가을마다 단풍잎과 은행잎을 사전에 넣었던 생각이 나서

갑자기 혼자 잘 물들고 모양이 예쁜 잎을 찾기 시작했다.



단풍잎은 많기도 하고 단풍나무가 높게 자라지 않아

단풍잎을 수집하기는 좀 쉬웠지만

은행잎은 나무가 너무 높았고

떨어진 잎은 이미 거무스름해서

내 마음에 드는 잎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나에게 채택된 잎파리들을 책 속에 고이 모셔놓고

집으로 왔다.


그래... 난 가방에 책을 넣고 등산을 했었다.

물도 0.7리터가 들어있었다.

혹시나 배고파지면 먹을 떡도 들어있었다.

그에 반해 그 3인방은 가방도 물도 없이 맨 몸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불리한 게임이었다.

내가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건장한 20대 초반 남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정도까지 게임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것이다.

라고 위안을 삼고 있다.ㅎㅎ


* * *


산을 올라가다보면 당연히 힘이 든다.

나보다 빨리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느려 내가 추월하는 사람도 있다.

힘이 너무 들면 적당히 올라왔으니 내려갈까?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누군가는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며 열심히 올라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주위 사람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며 올라가다보면 어느샌가 많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위의 풍경은 보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너무 목표만을 향해서 가는 것도 좋지 않고

너무 느긋하게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가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기엔 열심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또다른 시기엔 쉬엄쉬엄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나아가는 게 올바른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가는 것은 싫다.

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지언정

중간에 내려가면

결코 정상에서의 행복을 느낄 순 없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한 발자국씩이라도 올라가자.


* * *


산을 올라가면 당연히 내려도 와야한다.

정상에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인생에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오늘과 같이 내려가는 길을 즐기며 내려가고 싶다.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내리막길을 즐기고 싶다.




To be continued.........




Made by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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